후대신 시리즈 #3
전쟁이 끝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 뭘까요? 안도감, 기쁨, 그리고 평화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겠죠. 고대 그리스인들도 똑같았어요. 그들은 평화를 단순한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성한 존재로 여겼어요. 바로 에이레네(Eirene), 호라이 삼자매 중 막내였죠.
에이레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평화'를 의미해요.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번영, 풍요, 행복이 함께하는 완전한 조화의 상태를 뜻했거든요. 에이레네가 있는 곳에는 곡식이 자라고, 아이들이 웃고, 예술이 꽃피었어요.
에이레네는 두 언니 에우노미아(질서)와 디케(정의)의 결과물이었어요. 좋은 질서가 있고 정의가 실현될 때,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는 논리였죠. 그래서 호라이 삼자매 중 막내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어요.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평화였으니까요.
오늘은 고대인들이 가장 갈망했지만 가장 얻기 어려웠던 축복, 에이레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전쟁으로 가득했던 고대 세계에서 희망의 상징이 됐고, 어떤 방식으로 평화를 가르쳤으며, 현대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에이레네의 이야기는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고대의 답변이에요.

1. 평화의 탄생: 전쟁의 시대에 태어난 희망
호라이 삼자매의 막내이자 완성
에이레네는 제우스와 테미스 사이에서 태어난 호라이 삼자매 중 막내였어요. 맏언니 에우노미아가 질서를, 둘째 디케가 정의를 관장했다면, 막내 에이레네는 그 모든 것의 열매인 평화를 담당했어요.
에이레네가 태어났을 때 올림포스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어요. 아레스(전쟁의 신)가 갑자기 무기를 내려놓고 잠에 빠졌다는 거예요. 에이레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전쟁의 신조차 그녀 앞에서는 싸울 수 없었던 거죠.
어머니 테미스는 에이레네를 특별히 아꼈어요. 세 딸 중에서 가장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것이 에이레네였거든요. 테미스는 에이레네에게 이렇게 가르쳤어요. "평화는 약함이 아니다. 평화는 가장 강한 힘이다. 폭력은 일시적이지만, 평화는 영원하다."
에이레네는 언니들과 달리 강제성이 없었어요. 에우노미아는 질서를 강요할 수 있고, 디케는 정의를 집행할 수 있었지만, 에이레네는 오직 설득과 사랑으로만 작동했어요. 평화는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사람들이 스스로 평화를 원해야만 에이레네가 머물 수 있었어요.
플루토스를 안고 있는 여신
에이레네의 가장 유명한 이미지는 어린 플루토스(Ploutos, 부의 신)를 안고 있는 모습이에요. 이 이미지는 "평화가 부를 가져온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전쟁은 파괴하지만, 평화는 창조하고 번영시킨다는 거죠.
플루토스는 데메테르의 아들로, 농업의 풍요와 물질적 번영을 상징했어요. 에이레네가 플루토스를 돌보는 모습은 평화가 경제적 번영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보여줬어요. 전쟁 중에는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고, 무역도 할 수 없고, 예술도 발전할 수 없으니까요.
조각가 케피소도토스(Cephisodotus)가 만든 에이레네와 플루토스 상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였어요. 에이레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어린 플루토스를 품에 안고, 플루토스는 풍요의 뿔(cornucopia)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죠. 이 상은 아테네의 아고라에 세워져서 시민들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켰어요.
특히 기원전 375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평화 조약을 맺은 후 이 상이 세워졌어요. 수십 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죠. 시민들은 이 상 앞에서 제물을 바치며 "평화가 오래 지속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했어요.
전쟁의 신들과의 대립
에이레네는 전쟁과 관련된 신들과 늘 대립 관계에 있었어요. 특히 아레스(전쟁), 에리스(불화), 데이모스(공포), 포보스(두려움) 같은 신들은 에이레네의 천적이었어요.
아레스는 에이레네를 가장 싫어했어요. 에이레네가 머무는 곳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었거든요. 반대로 에이레네도 아레스의 폭력성을 혐오했어요. 두 신은 절대 함께 있을 수 없었어요. 하나가 오면 다른 하나는 떠나야 했죠.
하지만 흥미롭게도 에이레네는 아테나와는 좋은 관계였어요. 아테나도 전쟁의 여신이었지만, 그녀의 전쟁은 방어적이고 전략적이었어요.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면 에이레네도 인정했던 거죠. 실제로 아테네에서는 에이레네와 아테나의 신전이 가까이 있었어요.
에이레네와 에리스의 대립은 특히 극적이었어요. 에리스가 불화와 갈등을 퍼뜨리면, 에이레네가 나타나서 화해와 조화를 가져왔어요. 트로이 전쟁도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로 시작됐지만,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에이레네가 와서 치유했다고 믿어졌어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신들의 대립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어요. 인간 세상에는 항상 전쟁과 평화, 불화와 조화의 힘이 경쟁한다고 봤어요.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믿었죠.
계절의 여신으로서의 역할
에이레네는 언니들과 함께 계절을 관장하기도 했어요. 특히 여름, 수확의 계절과 관련이 깊었어요. 평화로운 여름에 곡식이 익고 과일이 열린다는 의미였죠.
농부들은 수확기에 에이레네에게 감사 제물을 바쳤어요. "평화로운 계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쟁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어요.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면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포도 수확과도 특별한 관련이 있었어요. 포도주는 평화의 상징이었어요. 전쟁이 아니라 축제와 대화의 음료였으니까요. 포도 수확 축제 때 에이레네에게 첫 포도주를 바치는 것이 전통이었어요.
올리브 수확도 에이레네와 연결됐어요. 올리브나무는 평화의 나무로, 오래 자라는 나무라서 장기적인 평화가 있어야만 재배할 수 있었거든요. 에이레네는 종종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됐어요.
계절의 순환은 자연스러운 평화를 상징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전쟁 후에는 반드시 평화가 온다는 희망을 주었어요. 에이레네는 그 순환의 보장자였던 거죠.
에이레네의 상징들
에이레네는 여러 상징물과 함께 묘사됐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올리브 가지, 풍요의 뿔, 플루토스(어린아이), 그리고 카두케우스(헤르메스의 지팡이)였어요.
올리브 가지는 평화의 가장 오래된 상징이에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도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오죠. 그리스에서도 평화 사절이 올리브 가지를 들고 다녔어요. 전쟁을 중단하고 협상을 원한다는 표시였거든요.
풍요의 뿔은 평화가 가져오는 물질적 번영을 상징했어요. 뿔에서 끊임없이 과일, 곡식, 꽃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평화 시대의 풍요를 나타냈어요. 전쟁은 소비하지만, 평화는 생산한다는 메시지였죠.
어린 플루토스를 안고 있는 모습은 에이레네가 부와 번영을 돌본다는 것을 보여줬어요. 아이를 돌보듯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야 한다는 교훈도 담겨있었어요.
카두케우스는 헤르메스가 두 마리 뱀이 싸우는 것을 중재한 지팡이예요. 이것도 평화와 협상의 상징이 됐죠. 에이레네가 카두케우스를 들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갈등을 중재하고 화해를 이끈다는 의미였어요.
2. 평화의 실천: 조약에서 축제까지
페르시아 전쟁과 에이레네의 귀환
에이레네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극적으로 등장한 순간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였어요.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 후 그리스 전체에 평화가 찾아왔거든요.
승리 직후 델포이 신탁소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에이레네에게 감사하라"고 신탁을 내렸어요. 전쟁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평화를 얻은 것이 더 큰 축복이라는 의미였죠. 각 도시는 에이레네 신전을 짓거나 제단을 세웠어요.
아테네는 특별히 성대한 에이레네 축제를 열었어요. 전쟁 중에 파괴된 것들을 재건하고, 전몰자들을 추모하고, 평화가 가져올 새로운 시대를 축하했어요. 이 축제는 이후 4년마다 열리는 정기 행사가 됐어요.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그리스 문화가 황금기를 맞이했어요.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는 건축, 조각, 연극, 철학 모든 분야에서 찬란하게 꽃피웠어요. 파르테논 신전도 이 평화 시기에 지어졌죠. "평화가 문명을 만든다"는 에이레네의 가르침이 증명된 거예요.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곧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에이레네는 다시 그리스를 떠나야 했어요. 30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은 그리스를 황폐화시켰고, 사람들은 에이레네를 간절히 그리워했어요.
칼리아스의 평화와 에이레네 제단
기원전 449년,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에 역사적인 평화 조약이 체결됐어요. '칼리아스의 평화'라고 불리는 이 조약은 거의 30년간 지속된 전쟁을 끝냈어요.
조약이 체결된 직후, 아테네는 아고라에 에이레네의 제단을 세웠어요. 제단에는 "에이레네, 우리와 함께 머물러주소서"라는 헌사가 새겨졌어요. 시민들은 매일 이 제단에서 기도하며 평화가 오래 지속되기를 빌었어요.
제단 근처에는 평화를 기념하는 조각상들도 세워졌어요. 전쟁으로 파괴된 무기들을 녹여서 만든 농기구 조각, 어린이들이 평화롭게 노는 모습, 풍요로운 수확 장면... 모두 평화의 축복을 표현한 작품들이었어요.
특히 매년 봄에 열리는 에이레네 축제는 아테네의 주요 행사가 됐어요. 시민들은 흰 옷을 입고 올리브 가지를 들고 행진했어요. 전쟁 중에 태어난 아이들을 에이레네에게 봉헌하는 의식도 있었어요. "이 아이들이 평화 속에서 자라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요.
하지만 역사는 반복됐어요.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 평화도 깨졌어요. 에이레네의 제단은 전쟁 중에 방치됐고, 사람들은 다시 에이레네가 돌아올 날을 기다려야 했어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 『평화』
기원전 421년,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평화(Eirene)』라는 희곡을 무대에 올렸어요. 이 작품은 에이레네를 주인공으로 한 정치 풍자극이었어요.
희곡의 줄거리는 이래요. 전쟁에 지친 농부 트뤼가이오스가 거대한 쇠똥구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요. 올림포스에 가서 에이레네를 찾아내 지상으로 데려오려는 거죠. 그는 에이레네가 동굴에 갇혀있는 것을 발견해요. 전쟁의 신들이 그녀를 가둬놓은 거예요.
트뤼가이오스는 다른 그리스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에이레네를 구출해요. 에이레네가 지상으로 돌아오자 모든 것이 변해요. 무기 상인들은 파산하고, 농부들은 기뻐하고, 포도밭에서 축제가 열려요. 희곡은 평화의 결혼식 장면으로 끝나요.
이 작품은 당시 아테네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줬어요. 10년 넘게 이어진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평화를 갈망했거든요. 실제로 이 희곡이 공연된 해에 니키아스의 평화 조약이 체결됐어요. 일시적이긴 했지만 전쟁이 중단됐죠.
아리스토파네스는 에이레네를 아름답고 온화한 여신으로 묘사했어요. 그녀가 돌아오면 술과 음식이 풍성해지고, 사람들이 웃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다고 했어요. "전쟁은 영웅을 만들지만, 평화는 행복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했어요.
공동 평화와 범그리스 회의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세계는 '코이네 에이레네(Koine Eirene)', 즉 '공동 평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전시켰어요. 단순히 두 도시 사이의 평화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함께 평화를 지키자는 거였어요.
기원전 386년의 왕의 평화(King's Peace), 기원전 375년의 제2차 아테네 동맹... 이런 조약들은 모두 에이레네의 이름으로 체결됐어요. 조약문에는 "에이레네의 뜻에 따라"라는 구절이 들어갔어요.
각 조약 체결 후에는 범그리스 회의가 열렸어요. 모든 도시국가 대표들이 모여서 평화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논의했어요. 이것은 어떤 면에서 국제연맹이나 UN의 고대판이었어요.
회의장에는 항상 에이레네의 상이 놓여있었어요. 대표들은 에이레네에게 맹세하며 평화 조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어요. 조약을 어기는 것은 에이레네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졌고, 다른 도시들이 연합해서 처벌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랐어요. 조약은 자주 깨졌고, 전쟁은 계속됐어요. 그럼에도 공동 평화라는 이상 자체는 중요했어요. 평화가 개별 도시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의 공동선이라는 인식을 심어줬거든요.
로마 시대의 팍스: 에이레네의 계승
로마 시대에 에이레네는 '팍스(Pax)'라는 이름으로 계승됐어요.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 팍스는 에이레네와 거의 같은 속성을 가진 여신이었어요.
특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팍스가 중요해졌어요. 아우구스투스는 오랜 내전을 끝내고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선언했거든요. 기원전 9년, 그는 로마에 '아라 파키스(평화의 제단)'를 세웠어요.
이 제단은 건축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걸작이었어요. 벽면에는 풍요로운 수확, 행복한 가족, 평화로운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었어요. 에이레네-팍스가 가져오는 모든 축복을 시각화한 거였어요.
팍스는 또한 로마 동전에도 자주 등장했어요. 올리브 가지를 든 팍스의 모습이 새겨진 동전은 제국 전역에서 유통됐어요. 이는 로마가 평화를 가져왔다는 프로파간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평화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했어요.
물론 '팍스 로마나'는 무력으로 강제한 평화였어요. 로마의 지배에 반항하는 민족들은 가혹하게 진압됐죠. 그럼에도 약 200년간 지중해 세계에 상대적인 평화와 번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이것이 에이레네-팍스의 역설이었어요.
3. 현대의 에이레네: 평화주의부터 UN까지
평화주의 운동의 탄생
에이레네의 정신은 현대 평화주의(Pacifism) 운동으로 이어졌어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평화주의는 전쟁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사상이에요.
퀘이커교도들이 초기 평화주의의 선구자였어요. 그들은 모든 전쟁을 거부하고 비폭력을 실천했어요. 윌리엄 펜이 펜실베니아를 세울 때 원주민들과 평화 조약을 맺은 것이 유명한 사례예요. 무력이 아니라 대화와 존중으로 평화를 이룬 거죠.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통해 에이레네의 철학을 문학으로 표현했어요. 전쟁의 무의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깊이 있게 다뤘죠. 그는 "폭력으로는 폭력을 막을 수 없다. 오직 사랑과 이해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했어요.
간디의 비폭력 저항(Satyagraha)도 에이레네의 현대적 실천이었어요. 폭력 없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은 평화의 힘을 증명했어요. 간디는 "평화로 가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가 길이다"라고 말했어요.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간디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 시민권 운동을 이끌었어요. 폭력과 증오에 맞서되, 사랑과 평화의 방법으로 맞선 거죠.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오직 빛만이 할 수 있다. 증오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에이레네의 가르침과 통해요.
국제연맹과 UN: 제도화된 평화
제1차 세계대전 후 인류는 에이레네의 꿈을 제도화하려고 시도했어요. 1920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창설된 거죠. 목표는 간단했어요. 전쟁을 예방하고,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국제 협력을 증진하는 것이었어요.
국제연맹의 로고에는 평화의 상징들이 가득했어요. 올리브 가지, 지구,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슬로건... 모두 에이레네의 이상을 담고 있었어요.
하지만 국제연맹은 실패했어요. 미국이 참여하지 않았고, 강제력이 없었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어요. 에이레네의 이상만으로는 부족했던 거죠. 제도적 뒷받침과 강력한 의지가 필요했어요.
1945년, 더 참혹한 전쟁을 겪은 후 UN(United Nations)이 창설됐어요. 국제연맹의 실패를 교훈 삼아 더 강력한 구조를 만들었어요. UN 헌장 전문에는 "우리 시대에 두 번이나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가져온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다음 세대를 구하기 위해"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것이 바로 에이레네의 현대적 선언이에요.
UN의 상징도 의미심장해요. 지구를 올리브 가지가 감싸고 있는 모습... 고대 에이레네의 상징을 그대로 사용한 거예요. 전 세계가 평화로 하나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어요.
노벨 평화상: 에이레네의 현대적 계승자들
알프레드 노벨이 제정한 노벨 평화상은 에이레네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현대의 월계관이에요. 평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기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노력하도록 격려하는 상이죠.
역대 수상자들을 보면 에이레네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어요. 국제적십자위원회(인도주의), 마틴 루터 킹(인권), 마더 테레사(봉사), 넬슨 만델라(화해), 말랄라 유사프자이(교육)...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평화를 실현한 사람들이에요.
특히 1979년 마더 테레사가 수상 연설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에요. "평화는 미소로 시작됩니다." 거창한 조약이나 제도가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친절과 이해에서 평화가 시작된다는 거예요. 이것이야말로 에이레네가 가르친 평화의 본질이었어요.
안타깝게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중 일부는 나중에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어요.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의 전쟁을 승인한다거나, 평화의 이름으로 억압을 정당화한다거나... 이는 평화가 얼마나 복잡하고 달성하기 어려운 가치인지 보여줘요.
적극적 평화와 소극적 평화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를 두 가지로 구분했어요.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예요. 이 구분은 에이레네의 본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거예요.
소극적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나 직접적 폭력이 없는 상태예요. 총소리가 멈춘 것이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에요. 구조적 폭력(가난, 차별, 억압)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거든요.
적극적 평화는 구조적 폭력까지 없는 상태예요. 사회 정의가 실현되고, 인권이 보장되고, 모두가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상태죠. 이것이 바로 에이레네가 추구한 진정한 평화예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번영과 행복이 함께하는 상태 말이에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워요. 겉으로는 내전이 없으니 소극적 평화가 있었어요. 하지만 인종 차별이라는 구조적 폭력이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평화는 아니었어요. 만델라가 투쟁한 것은 바로 적극적 평화를 위해서였어요.
현대의 많은 평화 운동은 이 적극적 평화를 지향해요. 전쟁 반대만이 아니라, 빈곤 퇴치, 인권 신장, 환경 보호, 성평등... 이 모든 것이 평화 운동의 일부가 된 거죠. 에이레네가 품에 안고 있던 플루토스(부의 신)처럼, 평화는 물질적 풍요와 사회 정의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에요.
평화 교육과 문화
유네스코(UNESCO)는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라고 선언했어요. 이는 에이레네가 강조한 것과 같아요. 평화는 제도만으로는 안 되고, 사람들의 마음과 문화 속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거죠.
평화 교육이 중요한 이유예요. 어릴 때부터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법,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 공감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은 학교에서 평화 교육을 필수 과목으로 가르쳐요.
문화 교류도 평화의 중요한 도구예요. 서로를 알게 되면 적대감이 줄어들거든요. 음악, 스포츠, 예술을 통한 교류가 때로는 외교보다 더 효과적이에요. 올림픽이 '휴전(Olympic Truce)' 전통을 유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언어도 중요해요. '적', '전쟁', '섬멸' 같은 전쟁 은유 대신 '파트너', '협력', '상생' 같은 평화 언어를 사용하면 생각도 달라져요. 에이레네는 언어의 힘을 알았어요. 부드러운 말이 폭력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기후 평화: 21세기의 새로운 과제
21세기에는 '기후 평화'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어요. 기후 변화가 분쟁과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거예요. 물 부족, 식량 위기, 기후 난민... 이런 문제들이 갈등을 유발할 수 있거든요.
시리아 내전의 원인 중 하나가 기후 변화였다는 연구가 있어요. 장기간의 가뭄이 농업을 파괴하고, 이것이 사회 불안으로 이어졌다는 거죠. 아프리카의 많은 분쟁도 사막화와 물 부족이 배경에 있어요.
그래서 기후 행동이 곧 평화 행동이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어요.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 지속 가능한 개발, 공정한 자원 분배... 이런 것들이 장기적으로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에이레네가 살았다면 기후 운동가가 됐을지도 몰라요.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있어야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요. 지구가 평화로워야 인간도 평화로울 수 있다는 거죠.
마치며
에이레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나요? 평화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번영과 정의와 행복이 함께하는 풍요로운 상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을 거예요.
에이레네는 호라이 삼자매 중 막내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어요. 에우노미아(질서)와 디케(정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에이레네(평화)였으니까요. 모든 좋은 통치, 모든 공정한 법의 목표는 결국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현대 세계는 에이레네를 절실히 필요로 해요.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평화를 향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어요. UN, 평화 조약, 평화 교육, 비폭력 운동... 이 모든 것이 에이레네의 꿈을 실현하려는 시도예요.
다음에 뉴스에서 전쟁이나 분쟁 소식을 듣게 되면 에이레네를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나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상 속 작은 친절, 이해하려는 노력, 갈등의 평화적 해결...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서 에이레네를 우리 곁으로 불러올 수 있어요.
에이레네는 강요할 수 없어요. 오직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해요. 고대 그리스인들이 에이레네를 여신으로 모신 것은 평화가 얼마나 귀하고 신성한 가치인지 알았기 때문이에요. 우리도 그 지혜를 기억해야 해요.
평화는 가능해요.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에이레네가 품에 안고 있던 어린 플루토스처럼, 우리도 평화를 소중히 돌보고 키워나가야 해요.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